사람들이 챗GPT를 끊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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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전
작성자 :
관셈보살

사람들이 챗GPT를 끊지 못하는 이유
/레이프 웨더비 뉴욕대 교수
올봄,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은 챗GPT의 소설 쓰는 능력을 선보이며 새로운 모델을 홍보했다. 그는 챗봇에게 메타픽션 스타일로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쓰라고 지시했다. 메타픽션은 작가 자신의 목소리가 직접 드러나는 자기반성적 장르다.
챗봇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손실 함수(loss function)’에 비유하는 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손실 함수는 현대 인공지능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수학의 일부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다. 올트먼은 이 대목을 치켜세우며, 현학적인 문학가들이나 다루는 복잡한 장르를 구사한다는 건 챗봇이 정말로 지능적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문학 교수로서 그 이야기가 해당 장르의 특징을 충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위대한 문학인지, 챗GPT가 문학 출판계를 장악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챗GPT의 지능을 증명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저 스타일 모방에 능숙함을 보여줄 뿐이다.
더 넓게 보면, 우리는 AI에 대해 논점 자체를 잘못 잡고 있다. 최근 '디 애틀랜틱’ 기사에서 타일러 오스틴 하퍼는 AI를 지능을 흉내 내는 로봇 인형극, 즉 '사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주장은 올트먼은 물론, '진짜 인공지능 시대가 곧 온다'는 실리콘밸리의 서사를 믿는 기술 전문가들의 생각과도 정면으로 충돌한다. 언어학자 에밀리 벤더와 사회학자 알렉스 한나 역시 AI가 사기라고 본다. 벤더 박사는 AI가 인간의 의미가 아닌 '합성된 텍스트’를 생산하는 일련의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한다.
이런 비판은 AI의 폭발적인 인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이 언어를 지능 시험의 도구로만 쓰는 게 아니라, 언어를 이용한 '놀이’를 즐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올트먼이 무심결에 드러낸 사실이야말로 핵심이다. 챗GPT 같은 거대 언어 모델의 열풍을 이끄는 진짜 원동력은 바로 '재미’다. AI는 엔터테인먼트의 한 형태인 것이다.
오픈AI는 이 점을 간파했다. 챗GPT는 단 두 달 만에 사용자 1억 명을 확보하며, 당시 가장 빠르게 성장한 플랫폼이 됐다. 최근에는 장난감 회사 마텔과 손잡았는데, 이는 대화하는 바비 인형의 탄생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수억 명의 사람들이 AI로 이메일을 쓰고, 가상 교사를 흉내 내고, 심지어 채팅 아바타와 사랑에 빠지는 현실에 비하면, 지능에 대한 끝없는 논쟁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린다. 학자 닐 포스트먼이 텔레비전의 부상을 보며 말한 '죽도록 즐기기’라는 개념은 AI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애초에 재미없는 것에 빠져들 수는 없다. 계산기와 사랑에 빠진 사람은 없지 않은가.
지능적인 존재를 상대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이름이 있다. 바로 '일라이자 효과’다. 이 이름은 1966년 컴퓨터 과학자 조지프 와이젠바움이 만든 최초의 챗봇에서 유래했다. 그는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주인공 '일라이자 둘리틀’에서 이름을 따왔다. 와이젠바움은 자신의 프로그램을 단순한 속임수라 여겼지만, 그의 비서가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다가 "챗봇과의 대화가 너무 사적이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늘날 AI 비평가들은 전 세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속임수에 현혹돼 일라이자 효과의 마법에 걸렸다고 보는 듯하다. 하지만 이 효과가 망상이 아니라, 대화를 계속하며 언어의 한계를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인간의 단순한 욕망의 표현이라면 어떨까.
'더타임스'의 기자 제임스 매리엇이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 '레이첼 페이퍼스'에 대한 AI 생성 리뷰를 올렸을 때, 그 글의 수준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잡지에 실릴 만한 글인지, 아니면 피상적이고 반복적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핵심은 지능이 아니라 단어였다. 문해력 위기에 대한 대중의 공포까지 더해진 온갖 비난과 고함 속에서, 나는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글을 읽고 해석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비디오 게임에 대한 공포가 팽배했다. 비디오 게임이 우리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고 멍청하게 만들며, 사회를 영원히 왜곡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이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았음에도, 예상과 달리 그런 일은 없었다.
AI의 가장 진지한 면모, 즉 시험 통과, 어려운 논리 및 수학 문제 해결, 각종 성능 평가 점수 달성 능력조차도 '퍼즐’이라는 엔터테인먼트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지적인 도전을 재미로 즐겨왔고, AI의 역사 역시 체스나 바둑 같은 게임으로 가득하다.
인지 과학자 앨리슨 고프닉이 이끄는 한 학자 그룹은 거대 언어 모델을 '문화 기술’로 규정했다. 챗봇이 방대한 인간의 지식, 글, 이미지 같은 문화적 생산물을 담고 있다는 의미다. 나 역시 동의하지만, 이러한 시스템을 사용하는 과정 자체가 지극히 재미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나리자를 편집하든, 소설을 비평하든, 논리 퍼즐을 풀든, 우리는 '놀이’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는 셈이다.
사람들이 이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예술과 언어를 가지고 논다는 점을 목격했다. 이 챗봇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시, 소설 등 온갖 장르 실험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로 나타난다. 이런 문학적 활용은 챗봇과 그 능력을 광고하는 데 쓰이며, 데이터 과학 논문에서 AI의 언어 능력을 측정하는 정량적 지표로도 활용된다. 이 효과는 언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픈AI는 초기 모델 중 하나를 '말 타는 우주비행사’라는 프롬프트로 생성한 이미지로 광고하기도 했다. 이 이미지를 보면 자연스레 "멋지다!"는 감탄이 터져 나온다. AI는 문화 기계다.
그렇다고 비평가들의 우려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의료, 군사, 채용 알고리즘 등에 AI가 활용되는 현실은 분명 우려스럽다. 반유대주의적 댓글로 물의를 빚은 일론 머스크의 '그록’ 챗봇을 미 국방부가 사용하겠다는 데 반색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문제의 본질이 AI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많은 시스템은 애초에 문제를 안고 있었고, AI는 해결책이 아님에도 그럴듯한 해결책처럼 보일 뿐이다.
무엇보다 AI를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으로 바라봐야 한다. 초등 교육을 '세서미 스트리트’에, 국가 정책을 '심시티’ 게임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이 훌륭한 프로그램들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AI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닐까.
*웨더비 박사는 뉴욕대 디지털 이론 연구소장이다.